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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육점 창업의 재도전

딱정오빠 2020. 11. 15. 19:10

2020년 11월 15일

현재 대학교를 졸업한지는 벌써 10년이 훌쩍 넘어간다.

  고3 어린 나이에 내 나름대로 대학교 타이틀 보다는 졸업하고 나서 취업을 하느냐 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여 들어간 곳은 취업률이 좋은 지방대 4년제 대학교 보건계열 작업치료학과였다. 그렇게 단순한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군대 가기전에는 정말 원없이 놀았던 것 같다. 학점은 신경쓰지 않은채...그렇게 군대를 가게 된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병장이 되었다. 병장을 달고서는 동기와 선임, 후임과의 대화의 주제는 여자이야기, 연예이야기에서 전역후에 뭐할까?에 대한 주제로 바뀌어 갔다. 다들 그렇게 전역 후를 걱정하고 불안해 할 때에 나는 앞으로를 대비해서 국가고시 합격하면 바로 취업이 가능한 보건계열에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그렇게 전역을 하고 예비역이 되었다.


전역을 하고 학교로 돌아오니 TV나 드라마, 인터넷에서처럼 예비역으로 구분이 되어지고 여후배들과 선배들의 설레는 순간이 계속 이어져 정신을 못차리고 어느새 3학년이 되어버렸다. 정말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 놀고 먹고 하는 긴 세월이 흘러서 나에게 남은건 3점도 안되는 학점......그렇게 나는 국가고시를 빡시게 준비를 해야하는 4학년이 되서야 평균학점을 3점을 넘겼다.

국가고시는 해부학부터 시작하여 정말 많은 공부량이 필요했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생각한 나의 전공이었다. 언제나 국가고시 탈락자 상위권 순위를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전공에 대하여 차곡차곡 쌓아 놓은게 부실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국가고시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자취방에서 공부하면서 어울리며 술먹기 좋아하던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늘려 나갔다. 결국에는 합격을 어렵게 했다. 이렇게 나한테 작업치료사 면허증을 받기까지 부모님의 지원으로 5천만원 이상이 들어갔다. 그때에는 몰랐다 당연한 지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까지 부모님은 날 챙겨줄 수 있으며 계속 건강하게 일을 하고 계실 것이라고 철없는 생각은 이어져 갔다.

그렇게 첫 병원에 취업을 했다. 참담했다. 첫 월급은 88만원정도, 그때 처음으로 돈의 개념을 느꼈다. 이돈으로 살아가기는 힘들구나. 내 나이 이십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데 이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가 없겠구나. 그렇게 인턴기간이 끝나도 120만원, 다른 곳으로 옮기고 옮기고 월급 220만원이 되었다. 난 어느 덧 경력 5년차. 30이 넘어가 버렸다.


미래가 없었다. 직업적으로는 보람이 있고 자부심이 많았다. 하지만 현실앞에서는 나의 미래를 그려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나의 첫 직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깜깜했다. 나는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믿어 왔던 작업치료사의 꿈이 사라지지자 나는 아무것도 매력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삼십대 초반에 할 줄 아는건 아무것도 없는 백수일 뿐이었다. 항상 든든하게 지원을 해주시던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반년정도의 마음고생과 다양한 아르바이트 결과로 나는 정육점을 창업하는것이 목표가 되었다. 

모두들 그렇게 말을 한다. 창업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나도 잘 안다. 그래서 준비기간이 필요한 것이고 다양한 경험과 많은 지인들이 필요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일부터 새로운 정육점에 취업을한다. 3년 정도 정육일을 계속 하다가 사실 공백 기간은 1년 정도가 있었다. 그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에피소드, 나의 생각은 차차 정리해 포스팅을 할 생각이다.

1년 만의 정육일이 많이 부담스럽다. 그래도 부담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정육점 창업을 위하여 한발 한발 나아 가야만 한다. 그렇게 오늘 밤은 설레임 반 걱정 반으로 흘러가고 있다.

정육점 창업까지의 나의 직업일지는 계속 될것입니다. 화이팅!